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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벌 생각은 없다 재능 나눌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을 뿐” / 2012.01.17

바닥부터 시작해 2년 만에 연 1억 매출 기록한 억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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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학 졸업장 있으면 밥벌이하기 더 좋지 않겠느냐’는 담임선생님에 등 떠밀려 지방 전문대 멀티미디어과 입학. 서둘러 군대 다녀온 뒤 결심한 바 있어 4년제 대학 시각디자인과 편입. 그러나 졸업 후 135개 업체에 문을 두드렸으나 보기 좋게 낙방. 1년 반 도전 끝에 브랜드 CI 전문업체 입사. 회사 경영난으로 6년 만에 백수가 됐지만 경력을 발판 삼아 디자인 회사 창업.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2년 만에 연 1억 매출 기록. 숨 쉬는 그날까지 사람을 위한 디자인 하고 싶은 나는 서른다섯의 디자이너, 김민식(사진)이다!”

 ▶ 어렵다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못해

 ‘밀레니엄’으로 시끄러웠던 2000년 5월, 전역하자마자 배낭을 쌌다. 한 달 동안 전국 도보여행을 떠났다. 복학해야 할지, 아니면 진로를 바꿔야 할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혼자서 650㎞를 걸었다. 길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삶이 행복하다’는 이들과의 만남은 큰 기복 없이 자란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교훈을 안고 디자인 학원으로 직행했다. 기초부터 튼튼히 한 뒤 제대로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지식이 눈의 암막을 걷어 주자 배움의 즐거움이 찾아왔다. 그 즐거움은 4년제 대학 시각디자인학과에 편입한 후에도 이어졌다. 어려서부터 붓을 잡았던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학교 작업실을 내 집 삼아 산 지 1년,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해 졸업할 때는 장학금까지 받았다. 그러나 열심히만 한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건 아니었다. 취업을 위해 무려 135개의 업체에 이력서를 냈지만, 지방대 출신인 나에게 면접 기회를 준 곳은 고작 4곳뿐. 그나마도 최종 단계에서 모두 떨어졌다. 그러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공과는 다른 브랜드 네이밍 회사에서 1년 반 동안 워밍업하면서 기회를 기다린 결과 유명 브랜드 CI·BI (Corporate & Brand Identity) 디자인 전문업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로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창작의 고통이 따라왔지만, 그때마다 나만의 사진첩을 꺼내 보며 열정을 되살렸다. 도보여행하면서 필름 카메라로 찍은 2000여 장의 전국 간판 사진들이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야간대학원 진학도 그중 하나다.

 ▶보기도 좋고 사람도 위하고

 대학원 3학기째. 슬슬 논문을 준비해야 하는데 좀처럼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불현듯 비 오던 어느 날 밤이 뇌리를 스쳤다. 한 시각장애인의 손에 들린 흰 지팡이가 빗물에 젖은 노란색 점자블록 위에서 쉴 새 없이 미끄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밤새 인터넷 국회도서관을 이 잡듯 뒤졌다. 몇 건 있었지만, ‘장애인 블록에 대한 사용자 편의증진과 안전성’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편도 없었다.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닌, 사람까지 위한 디자인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점자블록 연구에 뛰어들었다.

 점자블록은 이웃사랑의 결정체였다. 1967년 일본의 한 여관주인이 자기 집 앞 대로를 위험천만하게 건너는 시각장애인을 보고,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다 만든 것이 유래였다. 뿌리를 알고 나니 점점 더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위해 시각장애인협회 등 10여 곳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재 인도에 깔린 장애인 점자블록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전 세계 점자블록의 현황도 살폈다. 일본·홍콩·중국·마카오는 직접 찾아가 조사했고, 영국·뉴질랜드·미국·스웨덴·호주는 지인을 통해 정보를 획득했다. 

 1년 반 동안 논문 준비를 하면서 서울 시내 안 가 본 길이 없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점자블록의 설치 오류 사례를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특히 강남역 근처 인도 변에 설치된 검은색 점자블록을 본 후에는 디자인 연구 개발에 속도를 올렸다. 비장애인들의 관점에서 회색 보도에 노란 블록이 미관상 거슬린다고,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을 위한 최소한의 규정조차도 지켜주지 못하다니…. (점자블록은 주목성과 명시성이 높은 노란색의 설치가 기본 규정이다.)

 디자인 개량은 흰 지팡이를 두드리지 않고 밀면서 길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우선 원기둥 모양의 블록을 사각기둥 모양으로 바꾸고, 직선과 곡선 연결 부위의 골이 연결되도록 했다.

 ▶더불어 사는 디자인 세상

 6·25전쟁 제59주년이었던 날(2009년), 나는 백수가 됐다. 회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앞날이 막막할 때 우연히 ‘청년창업 1000 프로젝트’ 광고를 봤다. 대학원 논문 주제였던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행 시스템(점자블록 외) 디자인 연구 개발에 관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고, 우수사례로 선발돼 2년째 서울시 창업센터에 둥지를 틀고 있다. 상호는 ‘더하다디자인연구소’(www.thehada.net)로 지었다. 평범함에 특별함을, 생각을, 마음을 더하겠다는 나의 직업윤리를 담았다.

 브랜드 CI를 비롯해 네이밍·편집물 디자인·인테리어·웹디자인까지 사업 분야를 다각화하고 있다. 또 중국·뉴질랜드·미국 등 전 세계에서 뛰고 있는 15명의 디자이너와 협업을 통해 해외 사업도 꾸준히 수주하고 있다.

 지난날 거대 조직의 일원이었을 때는 억 단위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았던 나지만 창업 초기에는 100만 원짜리 일도 사양하지 않고 했다.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청년사업가로 이름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디자인한 선형블록을 세상에 내놓는 데 필요한 비용을 하루빨리 마련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선형블록으로는 돈 벌 생각 없다. 다만, 세상을 더불어 사는 시각장애인들과 나의 재능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지금 나는 꿈을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디자이너로는 ‘코카콜라’처럼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브랜드 디자인을 하는 것이고, 삶에는 디자인 도서관장이 되는 것이다. 갈 길이 멀고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조바심 내지 않는다. 박영석·피카소·스티브 잡스처럼 숨을 쉬는 그날까지 나의 운명을 디자인할 테니까.

사업하면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사람이다. 세상에 나보다 못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나보다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고, 그 하나는 내가 배워야 할 일들이다. 내가 상대를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사람은 내게 귀인이 돼 다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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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소장의 손에서 탄생한 각종 디자인들.